“바울 선생의 제3차 여행, 대개 주후 54년에 저 윗고을 갈라디아와 부르기아 지방을 다녀서 소아시아의 서남쪽에 있는 항구 도시로서 대도시인 에베소에 이르렀더니 예수님의 제자로 자칭하고 자임하고 있는 사람이 열두엇쯤 있었는데 그 사람들의 생활 행동을 가만히 볼 때에 진실하지 못하거나 훌륭하지 못한 것을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은혜의 계약 가운데 들어가서 사는 사람의 생활 방향과 인격적인 장성의 확연한 증거를 볼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가장 요체(要諦)가 되는 문제는 새로운 은혜의 계약의 시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사실, 예수님이 약속하신 보혜사이신 성신님이 역사(役事)하시는 문제입니다.” * 要諦 : 중요한 점. 요약할 요. 살필, 진실 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때에 관문이 있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 앞에 자기 자신의 신앙고백도 되고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하는 것이 되는 동시에 하나님께서도 그들에게 대해서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확인을 하시는 중요한 절차입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성례이고 그중에서도 세례입니다.”
“어떤 사람의 신앙과 은혜의 계약 가운데 접붙여진 여부를 가장 간단하고 명확하게 획선적(劃線的)으로, 금을 긋는 식으로 알려고 할 때에는 ‘무슨 세례를 받았는가? 세례 받은 의미는 무엇인가?’ 하고 묻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는 사람을 접붙여 주는 그 신앙의 대상은 누구냐 하면 메시야다. 요한이 자기 뒤에 오시는 메시야, 즉 그리스도에게 접붙여 준 것입니다.”
“에베소를 하나의 기점(基點)으로 해서 발전해 나갈 교회의 초석(礎石)으로서 활동하게 하기 위하여, 교회의 기둥같이 활동하게 하기 위해서 처음에 나온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은혜를 주시고 뽑아내시는가 하는 양태(樣態)를 보여 주셨습니다.” * 礎 : 주춧돌 초
“다 같이 예루살렘의 최초의 신약 교회를 회억(回憶)하면서, 보혜사이신 성신님의 내재(內在)와 활동을 믿고 의지하고 나아갔을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위험
<사도행전8>, 제5강 세례의 중요성, 128쪽
“사도 바울 선생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3차에 걸쳐서 여행을 하면서 교회를 세웠다는 것은 기독교 역사의 최초에 성신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은혜계약과 새로운 경륜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증시하면서 역사를 지어 나가는 최초의 중요한 개시(開始)인 것입니다. (중략) 이때에 신령하고 아주 현실적이면서 능력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땅 위에서, 지금 이 역사의 시기에 어떤 형태를 취하고 현현(顯現)하느냐 하는 문제를 증시하기 시작한 때라는 것입니다.” * 顯 나타날 현, 現 나타날 현.
“요한의 세례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는 세례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은 이미 지난 주일에 이야기했습니다. (중략) 그 근원을 보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온 것이지 사람이 제 마음대로 이렇게 하기로 작정한 것은 아닙니다. 요한의 세례도 그렇고 물론 그리스도의 세례도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양식(樣式)도 다른 것을 취한 것이 아니고 물을 가지고 하는 세례입니다.”
“요소적인 중요한 문제는 첫째로 (중략) 근본적으로 그 심정(heart)에 아주 극단적이고 전적인 변화가 있은 다음에야 준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그와 동시에 이 세례와 연결되어 있는 것은 사죄(赦罪)라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중략) 요한이 증거한 자기 뒤에 오시는 메시야에 대한 관념을 정당하게 갖고 신의(信依)하고 나아갔다면 요한의 세례만으로도 성례를 통과한 것입니다. (중략) 충만한 기독론적인 의미를 다 계시하지 아니한 그런 양태의 세례에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험 속에 이 열두 사람들도 빠져 들어갔던 것입니다.” * 赦용서할 사.
세례의 중요성
<사도행전8>, 제5강 세례의 중요성, 129쪽
“그 위험이 무엇이었는지 이제 우리가 생각해 보겠는데, 먼저 세례의 중요성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서 이 말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중략) 가톨릭에서는 소위 뱁티즈멀 그레이스(baptismal grace)라는 말을 써서 세례는 그것 자체가 그것을 시행했으면 그에게 은혜를 끼치는 부호(符號)가 되는 동시에 은혜를 끼치는 방법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중략) 그 사람이 충분한 기독론과 복음 사실에 대한 넉넉한 인식이 비교적 희박하다고 할지라도 세례 받은 그 사실이 그 사람에게 은혜로 역사하면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충분히 은혜의 방도(media gratiae)라고 이야기합니다.”
“루터교에서는 세례라든지 성찬이라든지 하는 성례가, 츠빙글리식으로 ‘하나의 완전한 기호에 불과하다. (중략)’ 하고 생각지 않고, 그것을 시행하는 그 시간과 그 공간에 예수님께서도 임재하셔서 거기서 그것이 상징하는 모든 은혜를 그 시간에 그에게 다 베풀어 주신다고 말합니다. 이런 점으로 볼 때에 상당히 공간적이라고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가톨릭 쪽은 물리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례나 성찬을 베풂으로 그것이 직접 동인(動因)이 되어서 거기서 어떤 유효성이 발생한다고 한다면 물리적인 이야기입니다. 인과(因果)의 관계를 가진 물리 이야기입니다.”
“그 물질 자체도 심지어 어떤 신비한 의미를 띠게 되는 것같이 이야기합니다. 또한 츠빙글리의 말대로 하자면 ‘(중략) 우리는 주를 기념하는 것이고 하나의 의식을 집행해서 그것으로 금을 그어 불신자와 신자의 세계를 나누고 그가 신자의 세계로 들어왔다는 것, 즉 그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왔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명확하게 확인하는 일이다’ 하는 정도에서 끝내기 쉽습니다.”
“하지만 개혁 교회가 전통적으로 믿고 또 성경이 우리에게 정당하게 가르친 도리로서 가장 중요하고 엄숙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는 세례는 그것 자체가 하나의 기호 혹은 징표이고 동시에 하나의 봉인, 즉 확인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에 대한 기호와 확인이냐? 요약해서 말하면 그 사람이 하나님이 은혜의 계약에 들어가서 예수 그리스도와 접붙임을 받아서 그로 말미암아 죄 사함과 중생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하나의 징표를 준다. 그것을 네가 확증으로 가지고 있거라’ 하는 의미입니다. 그와 동시에 내 편에서는 ‘이제부터는 이 새로운 생명으로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인생의 길을 걸어가야지 옛사람으로서 걸어가서는 안 되겠다. 그런고로 새로운 사람으로 걸어가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전부를 드립니다’ 하는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확인인 동시에 내 쪽의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하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8:19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신의 이름으로 모든 백성을 제자를 삼아서 세례를 베풀라”고, 마지막에 대사명(The Great Commission)을 내리실 때 그렇게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무릇 어떤 사람이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서는 죽은 사람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그 경영하신 대로, 선택하신 대로 성신님으로 역사해서 새로운 생명을 넣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중생(重生)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을 넣어 주신 사실이 그 사람의 의식 가운데 나타나는 사역을 성신님께서 하시면, 이것을 가리켜서 변개(conversion)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변개의 사실에는 첫째로 회개라는 사실이 따라옵니다. (중략) 거기서부터 획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의 참된 회개는 일생에 한 번뿐입니다.”
회개라는 말의 의미
<사도행전8>, 제5강 세례의 중요성, 132쪽
“그런데 성경에서는 회개라는 말이 정확하게 이런 의미로만 쓰이지는 않고 (중략) 어떤 경고가 이르고 책망이 있고 말씀이 그에게 오면 ‘아, 이거 잘못했구나’ 하고 깨닫기도 합니다. (중략)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재미있는 설교를 듣고 좋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그러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때를 말합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종교도 하려고 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도 섬기려고 하고 ‘하나님은 나를 요구하실 것이다’ 하는 주제넘은 생각도 하고, 자기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인정하고 무가치한 자신을 가치 있는 것같이 인정하는 일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깊이 느끼는 시간이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 참 잘못했다’ 하고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회개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식이라고 하면서도 아주 저급하고 비천한 위치에서 자식다운 아무런 인격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가 비로소 정신을 차려서 자기를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인정하고 자신을 가치 있는 것같이 인정하는 일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깊이 느끼게 하옵소서.
“그리스도적인 품성, 즉 그리스도적인 도덕적 성격과 인격이라는 것을 모르고 밤낮 몇 가지의 도덕적 조건에 비추어서 ‘이것은 괜찮다. 이것은 잘못했다’ 하는 정도에서 웃고 울고 자만하고 구안(苟安)에 빠져 있다면 기독교의 바른 도리를 체득하지 못한 것입니다. 기독교의 생활 지침은 ‘오직 성신을 의지해서 새사람으로 살아라’ 하는 데에 있지 옛사람적인 여러 가지 것을 가지고 개과천선(改過遷善)을 해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 苟 구차할 구. 遷 옮길 천.
오직 성신을 의지해서 새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자기의 잘못을 생각해 봐야 생각 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판하는 표준(criteria)이 그것뿐이기 때문입니다.”
“큰 의미를 안 가지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가리켜서 ‘임시적 회개’라고 하는데 이런 임시적 회개도 겉으로 보기에는 진짜로 회개하는 것과 여러 가지로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