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믿을 때에 성신을 받았느냐. (중략)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왜 다른 것은 안 묻고 ‘믿을 때에 성신을 받았느냐?’ 하고 물었겠는가”
“항상 모든 일에 하나님의 그 거룩한 계시와 그 은혜 가운데 살려고 하기보다 자기 선입관이나 생각이 앞서서 자기의 뜻대로 살면 성신께서 특별히 이런 것을 조명하셔서 깨닫게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갈구하지도 않는데 그런 것이 들어가서 특별한 의미가 거기 그 사람에게 진개(陳開)될 이유가 없습니다.” * 陳 : 늘어놓을 진.
항상 모든 일에 하나님의 그 거룩한 계시와 그 은혜 가운데 살게 하사 성신께서 특별히 조명하시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사실상 두 개의 큰 문제 앞에서 어떤 확호한 결단을 내려야 할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런 크라이시스(crisis)에 서 있었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그들의 전통적인 관념이나 생각은 무엇이고 그에 따른 그 사람들의 태도는 어떤 것인가, 메시야에 대한 기대와 소망은 무엇이었는가를 보면서 요한이나 우리 주 예수께서 그 사람들에게 준 것인 무엇인가 하면 최종적으로 세례입니다. 요한의 세례, 예수님의 세례라는 한 개의 중요한 실(seal) 혹은 사인(sign)으로 나타났습니다. (중략) 그러한 사인으로서의 의미를 가져야만 비로소 성례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결례(潔禮)라는 것이나 제사를 드린다는 것도 하나의 사인입니다. (중략) 물을 뿌리든지 손을 씻든지 이것도 하나의 사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이 조금이라도 죄를 씻는 데에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물을 가지고 씻을 수 있는 죄는 세상에 없습니다.” * seal : 증표. 潔 : 몸 닦을 결.
“이런 징표로서 세례가 대표하는 실(實)내용이 무엇이냐 (중략)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를 주었다는 의미를 바르게 생각하지 않으면 여기서 큰 착오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 實 : 열매 실
“두 가지 착오가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세례라는 것은 몇 번이든지 필요에 따라서 다시 고쳐서 받고 또 받아도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마치 침례교회에서 ‘침례가 아니라면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무효다’ 하는 것과 같이 세례의 징표라는 점을 무시해 버리고 양태(mode)를 더 중요히 생각하는 이런 일이 발생하기 쉽습니다. 둘째로, 만일 그것이 무엇인지 바르게 생각지 아니하면 세례가 가지고 있는 성례로서의 중요한 의미를 바르게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가톨릭처럼 ‘요한의 세례는 결국 성례의 의미를 갖지 않으므로 세례에 수반하는 독특한 은혜가 거기에 없다’ 하는 주장을 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현실적으로 무슨 영향이 있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요컨대 참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사상을 종합적으로 좀 더 풍부하게 가지는 데서 그 사람의 사상 생활이 풍부해지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어떠한 권선징악적인 적용을 금방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같이 생각한다면 모든 지식과 모든 탐구 역시 의미 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지식을 얻고 탐구하고, 참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사상을 종합적으로 좀 더 풍부하게 가지게 하옵소서.
“평생을 가도 하나님 나라의 그 거룩한 도리는 깊이 알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도리를 깊이 아는 것이 그 사람의 바른 정신과 또 인격을 함양해서 세워 주는 소이(所以)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도리를 깊이 알아 바른 정신과 인격을 함양해서 세워 나가게 하옵소서.
“그것 자체로 충분히 효과를 내고 성례로서의 의미를 다 가진다면 왜 에베소에 있는 열두 사람은 다시 세례를 받았는가”
구약의 성례와 신약의 성례
<사도행전8>, 제4강 요한의 세례 (2), 101쪽
“성례라는 것이 무엇인가 (중략) ‘세례를 받고 너희 죄를 씻으라’ 하였는데 이 말씀에서 중요히 생각할 것은 이것이 소위 성례적 표현(sacramental language)이라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아서 죄를 씻을 수 있습니까?”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표이고 실질상 효과와 능력은 내부에서 성신님이 일으키시는 것이다. 그래서 네 죄를 씻어 주신다’ 하는 의미입니다. (중략) 성신님이 그 안에서 역사하셨다는 역력한 증거가 있는 까닭에 이것을 행함으로써 첫째는 보이는 교회 안에 정식 회원으로서 입회를 하는 표를 삼고 둘째는 그 사람이 충분히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표적으로 그에게 실시했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 앞에서 증거하는 것뿐입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신앙고백으로만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 죄를 씻었다는 것을 믿고 의지합니다’ 할 때 ‘아, 그렇습니까’ 하고 받는 것입니다. 설령 그 사람이 거짓말을 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지 그 사람이 거짓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 검색까지는 않습니다. 교회는 그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중략) 창세기 17:10에도 있습니다. 거기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할례라는 것이 마치 계약인 것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의 성례는 유월절과 할례 두 가지이고 신약의 성례는 세례와 성찬입니다. (중략) 구약의 유월절과 할례라는 예전(禮典)은 개인적인 것보다 국민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략)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민족적인 색채가 아닙니다. 민족은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인인가 아닌가만 남는 것입니다.”
“둘째로 구약의 이 예전은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거기에 여러 가지 다른 것을 수반(隨伴)시켜서, 곁들여서 상징적으로 의식을 행하게 만들었습니다. 즉 제사나 결례도 다 구약의 성례를 보조하는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중략) 그런데 신약은 어떠냐 하면 성찬이 없으면 세례가 완전히 성립 안 된다든지 또 세례가 없이는 성찬이 완전히 성립되지 않는다든지 하는 일이 없습니다. (중략) 셋째로 구약의 성례전들이 장차 오실 예수님을 표현하고 있고 신약에 나타나는 성례들은 이미 오셔서 일을 이루신 예수님의 사실들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 隨伴 : 따를 수, 짝 반.
“넷째로 (중략) 지배하시는 방법은 개조(個條)를 하나씩 하나씩 들어 놓고 이 개조에 대해서 어떤 조건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소위 구약의 배타주의(particularism)라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세례나 성찬을 집행했을 때 내리시는 그 종합적이고 전체적인 중생과 새로운 생명의 활동과 또 새사람의 일과 성신님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온전히 신령한 생활을 경영할 수 있게 특권을 내리시는 이런 풍성한 은혜와 같은 은혜를 내리신 것이 아닙니다. (중략) 그러나 우리가 지금 예수님을 믿고 의지할 때에는 그런 모든 것이 다 종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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