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의 세례는 예수님의 세례와 본질상 동일함,
<사도행전8>, 제4강 요한의 세례 (2), 113쪽
“요한의 세례와 그리스도의 세례는 어떠냐 할 때 가톨릭은 ‘이것은 결코 같지 않다’고 말합니다. (중략) 고대에 있던 신학자들은 이 두 가지가 본질상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가지고 냉정하게 보면 그것은 본질상 같은 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제정해 주셨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둘째로 그 양식이 물로써 세례를 준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그리고 셋째로 가자 중요한 것은 그에게 아주 극단적이고도 근본적인 변화, 전적(全的)인 변화가 없이는 세례 안 준다는 점입니다.”
“누가복음 1:5-17에는 여러 가지 내용이 있는데 그 가운데 16절을 보면 주의 사자가 요한의 부친 사가랴에게 나타나서 요한이 태어날 것을 이야기하면서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의 하나님께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하고 말했습니다.”
“자기가 가고 있던 길에서 방향을 돌려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이 회개입니다.”“그 다음에 17절을 보면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돌아오게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중략) 자식들 가운데 많은 사람을 자기네 선조의 마음으로 돌이킨다는 것입니다. 선조가 가지고 있던 그 마음을 자식들에게 돌아오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어버리고 저희 마음대로 저희 세대의 정신만 가지고 살던 그 사람들에게 이제는 바른 정신이 돌아오게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이 근본적인 회개입니다.”
“누가복음 3:7-9을 보면, 이것은 마태복음 3:7-10에도 있은 말씀인데 (중략) 임박한 진노에서 피할 수 있는 길이 이러한 참된 회개인데 ‘누가 이것을 가르쳐서 이제는 행복을 추구하고 환난을 피하려고 이렇게 나오느냐’ 하고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행복주의(eudaemonism)와 종교적인 이익 추구에 대해서 맹렬하게 공격한 것입니다.”
“근본의 변화, 마음(heart)의 변화를 전제로 하고 말한 것이지 그러한 변화가 없는데 그 조목만 하면 산다고 이야기한 것은 아닙니다.”
“요한의 세례와 그리스도의 세례는 성례적인 의미를 가지고 죄를 씻는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죄를 씻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그 표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는 네 죄를 씻는다’ 하는 의미, 즉 사죄(赦罪)를 위한 성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볼로같이 그 세례를 받고 그 성례적인 의미를 나중에 깨달으면, 그것을 깨닫기만 한다면 반드시 예수의 이름으로 또 세례를 줄 필요가 없었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예수님의 세례와 다른 점
<사도행전8>, 제4강 요한의 세례 (2), 117쪽
“첫째로 요한의 세례는 구약의 이코노미하에 속해 있어서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실 일을 늘 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율법 시대에 속해 있어서 회개의 필요를 강조했습니다. 변개(變改, conversion)는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 소극적인 것은 회개고 적극적인 것은 전적인 신앙, 즉 구원의 신앙입니다. 지금 신약 시대에 와서 중요하게 가르치는 것은 주 예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일이 첫째로 오지 않고 믿으라는 말을 하는데 ‘네가 마음이 고쳐지고 전부가 변개되어서 주를 믿어야겠다’ 하는 것입니다. (중략) 셋째로, 이 세례는 주로 유대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이 가지고 있는 소위 보편주의(universalism)와는 다른 점입니다. 그러면 어떤 점에서 다르냐? 앞으로 자세한 설명을 더 듣게 되겠지만 우선 중요한 것은 이런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죄를 비춰 볼 때에 무엇에 비춰 보느냐 하면 율법에 의해서 합니다. (중략) 신약의 유니버설리즘이라는 것은, 형식상으로는 보편주의이고 내부에 있어서는 신령주의(Spiritualism)입니다. ‘사람의 육신이 연약해서 이룰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의 성신께서 하신다. 이렇게 해서 자연스럽게 율법의 제도를 이루고 율법의 요구를 이루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율법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그 하나하나의 강요에 대해서는 이제 우리는 상관이 없다.’ 이것이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의미의 한 부분입니다. (중략) 그리스도적인 새 생명으로 말미암은 새사람이 자연스럽게 건강하게 살아나가면 자연스럽게 그 성격이 하나님의 거룩한 그리스도의 품성에 맞게 되어 있습니다. 새사람은 그리스도적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만 살았느니라’는 그리스도 안의 새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는 안 되고 ‘얼마나 잘못이 많고 부족이 많은가? 지금은 몰라서 못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항상 자기 자신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성신님이 내려오셔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충만한 가운데 역사하셔서 생명의 성신의 법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려고 하는 이 사실은 모르고 구약적인 율법의 개조에 의해서 회개를 한다고 해서 그놈 하나에 대해서만 어떻게 하면 되는 줄 알고 이렇게 껍데기만 피상적으로 형성해 나가는 이것이 부정당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가톨릭이 그렇습니다.”
“수많은 프로테스탄트 역시 그렇게 하고 사는 것입니다. (중략)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신령한가? 내 안에서 성격이나 성품 전체가 조화 있고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와 같이 되어서 율법에 맞는가? 성품이 율법에 맞으면 자연히 행하는 것도 어떤 개조를 알아서 행하는 것보다는 율법이 요구하는 그 근본정신에 의해서 하게 될 것입니다.”
성신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충만한 가운데 역사하셔서 성격이나 성품 전체가 조화 있고 자연스럽게 율법이 요구하는 그 근본정신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