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29일 금요일

아덴 사람들의 요청으로 연설을 시작함, <사도행전7>, 제12강 바울의 아레오바고 연설, 276쪽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즉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늘 살아가느냐 하는 교훈에 마음을 늘 기울이고 있지 않으면, “저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괜히 신학이나 하고 성경론이나 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거기서 무엇이 나오느냐 하면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한 체하고 잘 믿는 체 하지만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이렇게 변론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얼마나 유해한가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늘 살아갈지 그것에 마음을 늘 기울이게 하옵소서.

2021년 1월 27일 수요일

기도 2, <사도행전7>, 제11강 바울 선생이 아덴에서 받은 두 가지 큰 인상, 267쪽

“우상이 비천한 것같이 보이지만 사실상 그 위대한 예술적인 행동이 지향했던 것이 그것이고, 위대한 철학적인 행동 역시도 결국 궁극적으로 그 사람들이 우상을 제작하는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자신들도 방황하면서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이끌고 나갔다는 사실을 거기서 확실히 보았나이다. 저희들 마음 가운데 형성되어 있는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사상과 정신으로 이런 것들을 바르게 볼 수 있는지 스스로를 점검케 하시고 아버님께서 저희에게 주신 크고 오묘한 도리를 천박한 데서 그냥 짓밟는 일이 없도록 깨달아 알게 하시옵소서.” 

1980년 9월 7일 주일 오전

2021년 1월 26일 화요일

기도 1, <사도행전7>, 제11강 바울 선생이 아덴에서 받은 두 가지 큰 인상, 267쪽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저희들의 마음이 항상 비천한 데 속해서 깊고 오묘한 것과 하나님 나라의 그 큰 도리를 깨달을 만한 마음의 준비도 없고 생각하는 일도 없이 그냥 흥뚱항뚱 자기의 생활에 붙들려 매달려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높고 귀한 진리의 내용에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접촉하지도 못하고, 자기 딴에 가지고 있는 몇 가지의 기독교적인 공식(formula)을 가지고 거기서 울고 웃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무엇을 얻었다고 감사하고 옅은 물에서 떠드는 이런 짓을 하기가 심히 쉽사옵나이다.”

2021년 1월 25일 월요일

예수 믿고도 행복주의를 버리지 못하는 폐단, <사도행전7>, 제11강 바울 선생이 아덴에서 받은 두 가지 큰 인상, 266쪽

“하나님 나라를 아타락시아나 아파쎄이아 같은 것으로 생각하면 큰 문제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거기에도 이르지 못하고, 진세(塵世)에서 여항간(閭巷間)에서 그냥 복작거리면서 살면서 괴로우면 울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기쁘면 ‘할렐루야’ 하면서 야단 내고 그러한 옅은 물에서 뛰어다니는 것도 원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큰 은혜의 세계를 바르게 나타내는 소위(所爲)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낮은 경지에서 방황하고 사는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 아타락시아(ἀταραξία) : 침착.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평정한 상태. 에피쿠로스학파의 주장. 
* 아파쎄이아(ἀπάθεια) : 부동심(不動心). 스토아학파의 주장.  
* 塵 : 티끌 진, 閭 : 마을 여, 巷 : 거리 항. 

근본적으로 바르게 생각하고 그리스도교가 우리에게 요구하고 혹은 가르치는 바를 바르게 깨달아 하나님의 나라를 바르게 터득하게 하옵소서.

2021년 1월 22일 금요일

아덴 사람들의 철학적인 활동에서 받은 인상, <사도행전7>, 제11강 바울 선생이 아덴에서 받은 두 가지 큰 인상, 257쪽

“일반 은총하에서 하나님의 형상인 미의 감각과 그 기능을 써서 오히려 마귀의 지배하에 있는 우상, 그 추(醜)와 악(惡)과 어두움과 어리석음과 하나님 나라에 반역하는 행동의 방향을 형성해 놓음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한 것입니다. 또한 지식이 어두워져서 진리가 아닌 다른 생각을 위대한 철학이라고 하면서, 그 어리석음과 암매를 알지 못하고 사람에게 가르치고 전하며 맹인이 다른 맹인을 인도하는 식으로, 스스로 위대한 지식이라고 꾸미고 나가지만 이 철학자들의 길은 결국 소경의 길이라는 것을 바울 선생은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성신님께서 저희 마음 가운데 빛을 비춰 주셔서 마땅히 가질 바른 정서, 즉 인생의 남용과 반역과 암매에 대한 분노의 정서를 갖게 하시고 그래서 인생에게 빛을 전하는 합리적이고 차서적(次序的)인 행동을 하게 하옵소서.

2021년 1월 21일 목요일

아덴 사람들의 우상 숭배에서 받은 인상 6, <사도행전7>, 제11강 바울 선생이 아덴에서 받은 두 가지 큰 인상, 255쪽

“미와 지식과 지혜의 도시인 아덴, 위대한 예술 작품들과 위대한 철학과 문학과 예술적인 문화적인 행동이 아덴의 위대한 예술품들의 심히 많은 수가 결국은 우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작품이나 또 여러 가지 작품을 생산하기 위한 각고와 훈련과 연마, 그리고 그보다도 더 중요한 예술가로서의 천품(天稟)과 노력, 요컨대 그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이런 일반 은총으로 말미암은 행동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희미하게나마 찾아가는 것이 정당한 일입니다.” 
* 稟 : 줄 품. 

하나님께서 주신 그 영광의 자태를 정당하게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옵소서.

2021년 1월 20일 수요일

아덴 사람들의 우상 숭배에서 받은 인상 5, <사도행전7>, 제11강 바울 선생이 아덴에서 받은 두 가지 큰 인상, 255쪽

“만일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거룩한 경지에 도달하려는 생활의 방향을 취하지 않고 세상의 문화와 세상의 예술과 세상의 지식과 세상의 번영과 찬란한 것들, 세상의 꽃을 탐해서 자꾸 붙들려 나간다면 거기 어디에서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것이 발생할 수 있겠습니까? 일단 그런 것이 다 포기되어 없어져 버려야 합니다.” 

세상의 문화와 예술과 찬란한 것들에 붙들려 나가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거룩한 경지에 도달하려는 생활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2021년 1월 19일 화요일

아덴 사람들의 우상 숭배에서 받은 인상 4, <사도행전7>, 제11강 바울 선생이 아덴에서 받은 두 가지 큰 인상, 255쪽

“마귀의 무서운 쇠사슬에 눌려 있는 인류 사회 전체의 움직임과 그 도도한 흑암의 흐름을 거기서 볼 때에 마음에 분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한 거룩한 분노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깊은 통찰을 가진 사람이 당연히 가지는 심정입니다.”  

하나님의 성신의 충만한 역사로 그 큰 지혜로 바르게 판단하고 거룩한 분노를 느끼게 하옵소서.

2021년 1월 18일 월요일

아덴 사람들의 우상 숭배에서 받은 인상 3, <사도행전7>, 제11강 바울 선생이 아덴에서 받은 두 가지 큰 인상, 255쪽

“참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새사람으로 사는 일은 그냥 몇 가지 도덕적인 교훈을 가지고 기다 아니다 논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근본적으로 새로 나고, 새로운 생명이 영혼의 기능을 사용해서 새로운 형태를 형성해야 하고 새로운 질서를 도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묵은 것을 수선해서 가져다가 붙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들이라도 하나님의 종들의 눈으로 볼 때에는 가장 인본주의적이고 가장 헬레리스틱한 것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회화에서, 조각에서, 건물에서, 문화적인 행동에서, 음악에서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새사람으로 살게 하옵소서.

2021년 1월 17일 일요일

아덴 사람들의 우상 숭배에서 받은 인상 2, <사도행전7>, 제11강 바울 선생이 아덴에서 받은 두 가지 큰 인상, 254쪽

“예술은 위대하고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사의 소산이니까 그것은 본뜨고 우상 숭배는 버린다고, 가장 지혜로운 체하고 그것을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못 나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동기나 그것을 이루어 나가는 위대한 열정을 불붙여 주는 모든 것이 사실은 우상에 대한 열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르게 생각하게 하옵소서.

2021년 1월 15일 금요일

아덴 사람들의 우상 숭배에서 받은 인상 1, <사도행전7>, 제11강 바울 선생이 아덴에서 받은 두 가지 큰 인상, 254쪽

“우상 숭배에는 인간 문화의 위대한 행동과 소산(所産)이 곁들여 있는 것입니다. 우상을 숭배하기 위해서 위대한 회화도 만들고 위대한 조각도 만들고 위대한 건물도 세우고 위대한 소상(塑像)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위대한 제례(祭禮) 의식도 행하고 위대한 음악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아무리 위대한 인간적인 예술적인 문화적인 활동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결국 모두가 다 우상 숭배 하나를 목표로 하고 나아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 塑(소) : 흙 빚을 소 

인간 문화의 위대한 소산이더라도 우상 숭배 하나를 목표로 하고 나아간 것을 받아들이지 않게 하옵소서.

2021년 1월 13일 수요일

아레오파고스 연설의 배경 2, <사도행전7>, 제11강 바울 선생이 아덴에서 받은 두 가지 큰 인상, 253쪽

“아직 복음 체계를 주기에 부적당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이 아덴의 아레오파고스에서 연설을 할 때에는 듣고 있던 사람들이 주로 에피쿠로스와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무엇인가를 물었고 사도 바울은 그 물음에 대답을 할 위치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물음에 대답하되, 거칠게 대답한 것이 아니라 대단히 부드럽게 훨씬 화해적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마음에 분기는 가득했지만 그것 때문에 일어나서 문제를 파괴하지는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 성신께서는 어떻게 하실 것인가 깊이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서 거기에 적응한 내용을 말하게 하옵소서.

2021년 1월 12일 화요일

아레오파고스 연설의 배경 1, <사도행전7>, 제11강 바울 선생이 아덴에서 받은 두 가지 큰 인상, 252쪽

“무릇 하나님의 종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거나 전할 때에는 자기가 생각한 것만을 어떤 일정한 공식에 의해서 쭉쭉 이야기하고 마는 것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듣고자 하는 사람의 상태가 지금 어떠한가를 대체로 자기가 먼저 설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제일 좋으나, 가령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정확하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반드시 다 잘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성신님의 인도로 차례차례 그들의 마음의 어떤 면에 저촉되는 것은 자신도 계획한 일이 아니고, 다만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성신께서 인도하시기를 원하면서 자기가 깊이 생각하고 자기 생각에 ‘이렇게 주는 것이 최선이겠다’ 생각하는 것을 주어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마음과 말을 주장하시고 인도하심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이것이 들어가게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저것이 들어가게 하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신께서 인도하시기를 원하면서 깊이 생각하고 결정하게 하옵소서.

2021년 1월 11일 월요일

바울 선생이 아덴의 문화에 대해 분기(憤氣)를 느낌, <사도행전7>, 제11강 바울 선생이 아덴에서 받은 두 가지 큰 인상, 250쪽

“강한 반감(反感)을 느낀 것이지 거기에 대해서 깊이 감동하고 찬양한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위대한 예술과 위대한 지적인 활동과 문화의 축조에 대해서, 그 찬란하고 아름답게 꾸며 놓은 것들에 대해서 결코 흠모나 찬양이나 감동이나 훌륭하다는 승인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마음에 분기를 느꼈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사상과 정신으로 이런 것들을 바르게 볼 수 있는지 스스로를 점검케 하시옵소서.

2021년 1월 10일 일요일

사도 바울이 아덴에 도착함, <사도행전7>, 제11강 바울 선생이 아덴에서 받은 두 가지 큰 인상, 246쪽

“모든 인간의 아름다운 노력의 방향이라는 것은 항상 암중(暗中)에 모색하는 것과 같고 흑암 가운데 사탄의 쇠사슬에 매여서 질질 끌려가는 상태와 같은 우상 숭배로 연결이 되어 있는 것인데 그곳에도 우상이 심히 많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높고 귀한 진리의 내용에 가까이 가게 하옵소서.

2021년 1월 9일 토요일

기도 2, <사도행전7>, 제10강 데살로니가에 전한 복음, 242쪽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의 말과 이론으로만 받아 버리고, 문제가 있을 때에나 악한 마음이 꾈 때에 그릇된 데로 들어가서 중상하거나 모략하거나 불의를 행하는 일들이 없게 하시고 우리가 자칫 잘못해서 방황하며 그릇된 완고 속에 빠져 들어가는 일이 없게 하시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품성을 언제든지 잘 보유하고 유지하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1980년 8월 31일 주일 오전

2021년 1월 8일 금요일

기도 1, <사도행전7>, 제10강 데살로니가에 전한 복음, 241쪽

“거룩하신 주님, 주님이 저희에게 고귀한 말씀을 주시면 그것이 말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의 큰 사실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면 하나님의 나라는 그냥 그런 이론과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큰 권능에 있는 까닭에 그로 말미암아 저희가 권능을 얻고 그 권능에 접촉하기를 늘 원하오며 그러기 위해서는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의 참된 의미와 심오한 것들을 스스로 개척하고 노력해서 성신님의 조명하심과 은혜 주시고 깨우쳐 주시는 속으로 들어가서 자기가 직접 터득해 나가고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야 할 것을 아나이다.”

2021년 1월 7일 목요일

데살로니가에 전한 복음 3, <사도행전7>, 제10강 데살로니가에 전한 복음, 241쪽

“자기 마음 가운데 ‘이것이 받아서 믿어야 할 진리라면 이것은 확신을 가져야 하겠으니까 확신을 가질 조건들을 내가 좀 더 찾아야겠다’ 하고 찾아 나간 것입니다. 이런 태도와 품성은 고귀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도시 한가운데에 큰 무리가 모여 있는 데가 아니라 베뢰아같이 큰길 바깥에서 조용히 숨어서 살던 사람들에게 있던 품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간곡한 심정을 가지고 받아들이고 거기에 대한 확신을 보태고 증가시키기 위해서 과연 그러한지 여부를 더 연구해서 제 것으로 삼는 태도가 있게 하옵소서.

2021년 1월 6일 수요일

데살로니가에 전한 복음 2, <사도행전7>, 제10강 데살로니가에 전한 복음, 240쪽

“바울 선생에 대해 현저하게 언제든지 붙어 다니는 유대인들의 태도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말씀의 거룩한 의미를 바르게 해석하고 깨달아서 구원을 받으려고 하지 않고 그 말을 꼬투리 잡아서 오히려 자기의 목적에 합당하게 가장 그럴듯하게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예수는 메시야고 메시야는 왕이다’ 이러면 ‘메시야, 예수라는 임금이 따로 있다’ 벌써 그리로 논리는 뛰었습니다. 가이사는 임금이 아니고 이 메시야 예수가 임금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이 가이사가 임금이 아니라는 말을 한 일도 없고 그의 사상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예수가 메시야라고 할 때에는 가이사와 대립되는 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그렇게 끄집어내는 데에 있습니다. 이런 괴악한 생각은 오직 마귀의 충동을 받아서 독한 시기와 미움이 속에 있을 때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거룩한 의미를 바르게 해석하고 깨닫게 하옵소서.

2021년 1월 5일 화요일

데살로니가에 전한 복음 1, <사도행전7>, 제10강 데살로니가에 전한 복음, 237쪽

“예를 들면 이사야 53장에는 여호와의 종이 우리를 대신해서 고난을 받는 것을 가르치고 있고 다니엘 9:26을 보면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이 이미 확연한 역사의 사실로 그것을 목도한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죽지 않고 다 살아 있지 않느냐? 예수님은 돌아가시고 만 것이 아니라 부활하셨다. 천하에 고왕금래(古往今來)에 누가 이 조건에 충당한 분이 있느냐? 그분밖에 없지 않은가? 메시야로 오셔서 큰 권능으로 행하시고 그다음에 그는 고난을 받으시고 돌아가시고 그리고 다시 살아났다’ 하고 전한 것입니다.”  

복음의 바른 내용 안에 서게 하옵소서.

2021년 1월 4일 월요일

종교적 선입견의 문제와 개혁 정신의 태도 7, <사도행전7>, 제10강 데살로니가에 전한 복음, 235쪽

“우리들은 항상 말씀을 들은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반성하고 자기를 다시 도마 위에 놓고 총 평가를 하고 붙일 것을 다시 붙이고 잘못된 것은 다시 제거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항상 우리에게 반복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고 말씀을 이론으로만 자꾸 가지고 있습니까? 개혁 신앙이라는 이론을 신학교 가서 쭉 배우면 별수가 생깁니까? 한우충동(汗牛充棟)의 서적들을 다 읽어 가지고 신학을 섭렵(涉獵)해서 안다고 해서 별스럽게 하나님 나라에 큰 보탬이 될 만한 것이 그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 한우충동 : 짐으로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리고, 쌓으면 들보에까지 찬다는 뜻으로, 가지고 있는 책이 매우 많음을 이르는 말.  

항상 말씀을 들은 다음에 저의 태도를 반성하고 저를 다시 도마 위에 놓고 총 평가를 하고 붙일 것을 다시 붙이고 잘못된 것은 다시 제거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항상 반복되게 하사, 하나님의 말씀이 거룩한 능력으로 저에게 존재하게 하옵소서.

2021년 1월 1일 금요일

종교적 선입견의 문제와 개혁 정신의 태도 6, <사도행전7>, 제10강 데살로니가에 전한 복음, 234쪽

“그러면 우리는 마음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법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자리를 어떻게 취하고 있습니까? 가령 데살로니가 사람과 같이 자꾸 설득해야 비로소 그 말을 받아들입니까, 아니면 베뢰아 사람과 같이 말씀 자체에 깊이 들어가서 받은 내용을 말씀에 의해서 자기가 증험하고 확인하고 살아갑니까? 그렇지 않으면 아덴 사람과 같이 무슨 새로운 소리를 자꾸 해 주어야만 하고 그렇지 않으면 흥미가 없다고 생각합니까? 말씀의 내용을 깊이 가르치고 그것을 들어 버릇하면 자꾸만 새로운 소리를 듣기 원하는 폐단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자기네의 생활에는 별로 접촉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말씀 자체에 깊이 들어가서 받은 내용을 말씀에 의해서 증험하고 확인하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한 경우 2, <교회에 대하여 4>, 제51강 성신을 좇아 행치 않음(2), 183쪽

“다른 사람들, 친구들 모두가 복잡하게 성경을 해석해 가지고 결국 이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 놓으면, 그것이 과연 그런지 아닌지를 알 만한 능력도 없고 하나님의 뜻을 자기가 깨닫지도 못하면서도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지적으로 흡수를 해서 그것에 자기...